- 어차피 이 모임의 목적이 책읽고 글쓰고 주기적으로 만나는 핑계김에 놀기도 해 보자!... 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비록 오늘 세미나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이뤄지지 못했지만서두, 이왕 소개하려고 준비했던 자료들이 있었고 (제 기준으론) 어느 정도 유익하기도 하니까, 참고자료인 셈 치고 포스팅해 둘게요. 큰 꼭지로 세 가지 정도 됩니다.
1. 슈퍼히어로의 탄생과정
- 먼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히어로들 :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등등이 어떻게 탄생해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익히 알고 계시겠지만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산 슈퍼히어로 캐릭터가 운용되어 온 역사는 적게는 십수년에서 많게는 5~60년을 헤아립니다. 말하자면 2차대전 직후 미국이 슈퍼파워로 떠오른 것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때문에 히어로물에 대한 비평들은 보통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위상을 슈퍼히어로의 캐릭터성과 한묶음으로 엮어보는 경향이 있죠. 헌데 이런 방식의 비평은 보통 지나치게 기계적인 은유로 환원되어버리는지라 (히어로 = 미국, 이정도면 직유인가?;) 개인적으로 딱히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작품에 대한 애정이 결여된 느낌이랄까요...
- 중요한 것은 이들 캐릭터가 수십년간 여전한 '인기' 를 누릴 수 있는 저력의 뒷배경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저는 그 창작 시스템에 비밀이 있다고 봅니다. 미국산 슈퍼히어로들은 보통 코믹스에 그 바탕을 두는데, 이 코믹스들의 창작과정이 재밌거든요. 일단, 작품이 작가에게 귀속되는 형태가 아닙니다. 캐릭터와 스토리의 저작권은 코믹스 회사 (DC, 마블로 대표되는) 에 귀속되고, 작가는 이를 위탁받아서 창작하는 형태인 거죠. 그래서 같은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전혀 다른 작가의 독립적인 시리즈물이 무지무지하게 많습니다. 스파이더맨을 예로 들자면, 그냥 스파이더맨,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프랜들리 네이버후드 스파이더맨, 센세이셔널 스파이더맨, 스파이더 아일랜드... 등의 시리즈가 전부 같은 시기에 나와서 각각 스토리를 전개했죠. 이걸 다 챙겨보는 건 불가능합니다. "다 보는 게 가능한" 일본식 애니에 익숙한 사람이 가장 크게 당황하게 되는 부분이에요.
- 자, 스파이더맨의 소속사는 마블코믹스입니다. 마블코믹스는 캐릭터의 일관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작가들에게 창작의 자유를 허용하죠. 헌데 작가의 입장에서 이건 큰 제약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일단, 죽이면 안돼요. 주인공에게 큰 굴곡이 될만한 사연을 부여해도 안됩니다. 큰 의미에서 캐릭터를 '전개' 할 권리는 어디까지나 마블코믹스에게 있으니까요. 작가가 할 일은 마블의 뜻을 해하지 않는 선에서 서사가 아닌 캐릭터에 집중하는 것 뿐입니다. 열린 이야기, 즉 '에피소드' 밖에는 만들 수 없는 거죠. 시트콤 창작같은 걸 생각하시면 적절할 듯 합니다. 철저히 캐릭터에 집중하고, 서사는 잊혀집니다. 스파이더맨이 태어난 지 수십년이 됐지만 그간 일어났던 사건 중에 중요한 거라곤 손에 꼽을 정도니까요. 대신, 캐릭터는 공고하게 되죠.
- 어쨌건 그렇다면 마블은 스파이더맨을 어떤 캐릭터로 만들려고 할까요? 당연히, 잘 팔리는 캐릭터입니다. 배경사를 적절히 가져다 붙이고, 시대 변화에 따라 캐릭터에도 그럴싸한 굴곡을 부여하고... 미국 코믹스시장을 대표하는 마블과 DC 양사는, 이렇게 '잘 팔리는' 영웅캐릭터를 만드는 데에 수십년을 투자한 회사들입니다. 그 과정에서 굉장히 단순했던 초기의 슈퍼히어로 캐릭터들은 그럴싸한 배경사와 성격을 지닌, 상당히 트렌디하고 대중적인 인물들로 진화하게 되었죠. 수십년간 이 작업에 투자된 작가의 역량, 회사의 자본, 그리고 누적된 독자의 피드백은 단순히 천재작가 한두명의 노력이 쫓아갈 수 있는 무게가 아닙니다. 어떻게든 잘팔리는 상품을 만드려는 자본의 욕망이 수십년간 누적된 결과물이란 말이죠. 도요타가 자동차를 연구하고 삼성이 반도체를 연구하는 동안 이 회사들은 슈퍼히어로를 연구하고 있었던 겁니다.
- 사실 슈퍼히어로가 미국 개인주의의 산물이란 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일본놈을 무찌르는 각시탈이란 캐릭터가 있었고, 북한에는 미제를 무찌르는 똘이장군이란 캐릭터가 있단 말이죠. 게다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어린이들이 즐겨보는 만화의 절대 다수는 "착한놈이 나타나 악당을 무찌르는" 이야기잖아요. 영웅과 악당의 대립은 너무나도 원초적인 플롯인지라 어느 나라나 민족의 성향에서 원조를 따진다는 게 무색해 보입니다. 사실 미국산 슈퍼히어로의 프로토타입도 찾아보면 북녘의 똘이장군이랑 다를 바가 없어요. 2차대전때 탄생한 캡틴 아메리카 같은 캐릭터의 초기 모습은 거의 텔레토비 수준이란 말이죠. 정의를 위해 뛰어나가 네 컷만에 히틀러를 무찌르는...-_-; 헌데 미국산 히어로들은 이후 수십년에 걸쳐서 자본과 자본에 고용된 천재작가 (예컨대 배트맨을 재창조한 팀 버튼 감독이라든지) 들의 정교한 개조작업을 받았고, 다른 나라에는 이런 시스템이 없었던 것 뿐이죠.
- 미국에 견줄만한 만화왕국이라곤 일본 정도인데, 재패니메이션은 유난히 "작가" 와 서사의 위상이 강한 "닫힌 이야기" 를 추구하는 편인지라 동일한 캐릭터가 재활용될 여지가 별로 없죠. 미국산 코믹이 캐릭터 위주의 상업적 성격을 띈다면, 일본산 코믹은 서사 위주의 작가주의적 성격을 띈다고 볼 수도 있고... 이런 건 따로 이야기할만한 주제가 될 수도 있겠군요. 재패니메이션에도 미국을 점령한 "캐릭터중심" 의 이야기 : 포켓몬스터의 예가 있으니까.
-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슈퍼히어로가 인기있는 건 그들이 그만큼 매력있기 때문이란 겁니다. 그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돈을 투자한 덕분이기도 하구요. 철저한 자본의 논리 아래에서, 캐릭터들은 무한경쟁을 펼칩니다. 매력 없는 히어로는 사장되기도 합니다. 안팔리면 단종되요. 스토리상 죽기도 하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하구요. 대표적인 게 아이언맨 같은 캐릭터는 한동안 처박아 뒀다가 최근에 다시 꺼냈는데, 대박난 케이스죠. 캡틴 아메리카도 2차대전 후로 한동안 박아뒀다가 다시 꺼낸 케이스고. 이건 뭐, 세상에 약한 사람이 많아져서 영웅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런 말로 단순화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잘 만들었으니까 많이 보는 거에요. 그냥... 망조난 히어로 캐릭터가 얼마나 많은데... 가끔 사람들이 문화상품기획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는 거 같아서, 좀 아쉽기도 하고...
2. 마블 유니버스의 이해
- 그럼 본격적으로 미국 코믹스의 양대 산맥, DC와 마블 중에 제가 잘 아는 마블 유니버스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해 봅시다. 정말 간략하게만 이야기할 겁니다. 겁먹지 마시고...
- 마블 '유니버스(Universe)' 라고 함은, 즉 마블에게 저작권이 귀속된 캐릭터 전부가 "같은 세계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토르, 헐크, 울버린, 캡틴 아메리카 등등의 캐릭터들이 같은 세계에서 활동하며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거죠. 코믹스에서는 이들 히어로의 집합인 '어벤져스' 시리즈가 시작된 이래로 이삼십년 가까이 지속된 세계관이고, 이제 캐릭터 각각의 이야기는 사실상 많이 중화됐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스파이더맨이 주인공인 코믹스를 봐도 아이언맨이 나오고, 아이언맨에도 헐크가 나오고... 다만 이제 막 초기 시리즈가 시작된 영화에서는 좀 낯설 수 있겠죠. 흠... 암튼 최근 마블 슈퍼히어로 캐릭터들의 진화는 대부분 슈퍼히어로 상호간의 관계와 갈등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영화를 코믹스 사업의 연장으로 보고 있는 마블 입장에서는 영화판 어벤져스의 개봉이 필연적이었을 겁니다. 성공할지는 미지수지만서두... 여하튼 마블 유니버스는 크게 세 부류로 나뉩니다.
- 첫번째가 판타스틱 포(Fantastic Four). 영화도 개봉했다가 큰 재미는 못 본 걸로 아는데, 여하튼 역사는 참 오래된 캐릭터입니다. 우주로 나갔다가 태양폭풍에 휘말리는 사고를 당해서 초능력을 갖게 된 네 명의 과학자... 들이죠. 몸이 쭉쭉 늘어나는 미스터 판타스틱, 보호막도 만들고 투명화도 되는 인비저블 우먼, 불꽃을 일으키는 휴먼 토치, 돌처럼 생기고 힘 쎈 더 씽. 네 명으로 이루어진 팀입니다. 주로 지구의 일에 관여하기 보다는 우주로 모험을 떠나고, 우주에서 닥쳐오는 모험에 맡서고, 다른 차원으로 떠나는 등등... 달에 인간을 쏘아 보내던 60~70년대의 감수성이 물씬 묻어나는 이야기가 주류를 이룹니다. 실제로 상당히 낙천적이고, 전반적으로 밝은 색체의 시리즈물이죠. 근데 이젠 시대가 좀 많이 변한지라... 요새는 그다지 인기는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ㅡ.ㅡ
- 두번째가 엑스맨(X-men). 관련 영화도 많이 개봉했고 평가도 좋았죠. 초능력을 가진 소수의 인간들, 즉 돌연변이들이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뭐 울버린, 자비에르 박사, 매그니토... 이런 사람들은 아시...죠? 이 시리즈의 경우, 초창기에는 자비에르와 매그니토의 대립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었습니다. 더 단순히 말하자면 착한놈과 나쁜놈의 대결이에요 그냥; 자비에르 박사는 착한 사람, 매그니토는 지구를 정복하려는 나쁜놈... 헌데 시대가 흐르면서 시리즈 자체가 소수자의 생존에 관련한 은유로 변화하게 됩니다. 자비에르 박사는 인류와 공존하려는 돌연변이 세력, 매그니토는 돌연변이가 인류진화의 결과라고 믿으며, 더 발전된 종이 인류를 정복하고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돌연변이 세력. 그 와중에 인류는 둘 다 싫어해서 착한 자비에르 박사는 착한 일 하고도 핍박받고... 뭐 이런 이야기였죠. 요새는 이 대립구도도 거의 사라지고, 어떻게든 인류와 독립해서 "살아남으려는" 돌연변이들과 참 집요하게 이걸 방해하고 핍박하는 인류의 대립구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워낙 노골적으로 사회적 소수자의 은유가 되다보니... 성적 소수자 담론에서 엑스맨의 이야기 구조를 인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더라구요. 인기는? 좀 매니악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세번째가 어벤져스(Avengers). 토르,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가 중심이 된 '슈퍼히어로 팀' 인데, 실질적으로 마블 유니버스의 중심이자 나머지 두 부류의 이야기를 포괄하기도 하는 이야기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벤져스의 기원은 천둥신 토르의 동생인 로키(Loki)의 음모에 대항하게 위해 히어로들이 뭉친 거라고 하는데... 역시나 '뭉치면 팔릴만한' 캐릭터들을 모아다가 팔아먹어 보려던 게 그 기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워낙 개성이 출중한 캐릭터들을 모아놓은 만큼, 어벤져스의 주 이야기는 이들 히어로간의 갈등과 화합입니다. 뭐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 진정한 위험 앞에서 힘을 합치는 이야기 따위... 헌데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질려가기 시작하자, 슬슬 히어로간의 "갈등" 을 주 에너지원으로 삼는 이야기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사소한 다툼이 아니라 진짜 가치관의 차이 때문에 갈라서고 싸우는 거죠. 요새 마블 유니버스의 대세가 '히어로끼리 싸우게 하고, 악당은 그 후에 투입한다' 라고 하는데... 이런 경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시빌워(Civil War)라는 이벤트입니다. 세번째 꼭지가 이거에요. 흠흠...
- 이상 마블 유니버스를 간략하게 살펴봤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각 시리즈의 원형은 마블 유니버스의 탄생 시기라 할 수 있는 60~70년대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반영하면서도, 21세기의 외양에 걸맞게끔 진화를 거듭해 왔다는 거죠. 물론 이게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라서, '무한한 우주로 떠나는 모험' 정도가 모토라고 할 수 있는 판타스틱 포 같은 경우에는 그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요새는 어쩐지 어벤져스 시리즈에 얹혀가는 느낌을 많이 받곤 합니다... 흠흠
- 물론 여기까지의 설명이 지나치게 오덕스럽다고 느낄 사람도 있을텐데 ㅋㅋ; 마블은 영화사업을 코믹스 사업의 연장선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곧 코믹스에서 형성된 캐릭터를 그대로 가져다가 '열린 이야기' 를 만드는, 코믹스에서 작가를 고용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유난히 작가적인 입김이 강한 감독들은 다 짤렸습니다. <헐크>의 이안 감독은 영화가 망했으니 그렇다 치고, <스파이더 맨>을 대히트 시킨 샘 레이미도 얄짤없었습니다... 고로 앞으로 개봉할 마블 코믹스 영화들은 여기서 설명한 '마블 유니버스' 의 큰 테두리 안에 있게 될 겁니다. 마블 경영진은 일단 이야기의 완결성보다는 마블 생태계의 확장이 중요하다고 보는거죠. 그게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경우의 파급력도 충분히 알고 있고...
- 이 점에서 DC코믹스는 맥을 좀 달리합니다. DC의 간판 히어로인 슈퍼맨이나 배트맨 같은 경우엔 오히려 영화에서 이루어진 재해석에 많은 덕을 본 편이죠. 그렇고 그런 자경단 캐릭터에 불과했던 배트맨을 우울하고 신경질적인 영웅으로 재탄생시킨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나, 최근에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가 받은 평단의 환호가 그렇고, <슈퍼맨 리턴즈>나 <스몰빌>시리즈도 그렇고... 아 DC쪽은 잘 모르겠네요;
3. 시빌 워 : 가면을 쓴 영웅의 고뇌
- 마블 유니버스의 거대 이벤트였던 시빌 워를 간략히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 일군의 젊은 히어로들이 활동중에 사고를 일으킵니다. 스쿨버스 한 대가 날아가고 사람이 무수히 죽죠. 시민들의 항의가 이어지고, 미국 정부는 '초인등록법' 을 발의합니다. 모든 슈퍼히어로들을 정부에 등록시키고 정부의 허가 하에 활동하게끔 하겠다는 거죠. 슈퍼히어로 사회는 크게 동요합니다. 아이언맨과 판타스틱 포의 리드 리처드 등은 정부에 찬동합니다. 반면에 캡틴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하는 히어로들은 정부에 반대하며 지하로 숨어들죠. 결국 두 패로 나뉜 슈퍼히어로들은 지지고 볶고 싸우다가 몇 사람이 죽고... (주로 인기 없는 애들...;) 아이언맨에게 설득돼서 대중 앞에서 마스크를 벗어버린 스파이더맨의 가족이 결국 테러를 당하기도 하고... 어쨌든 갈등은 심화되는데...
- 두 패의 히어로들이 대립하는 과정은 이제껏 슈퍼히어로물이 얼마나 가파른 진화의 길을 걸어왔는지 여실히 보여줍니다. 내가 정의의 편에 서 있는지, 내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지, 내가 힘을 휘두르는 방식이 옳은 건지 고민한 적도 없고 고민할 필요도 없었던 이들을 단체로 다원적 세계관에 몰아넣고 혼란에 빠지는 걸 지켜보는 거지요. 이들은 공공연히 '가면을 벗고' 대중 앞에 나설 것을 종용당합니다. 하지만 슈퍼히어로에게 가면은 단순히 신분을 숨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가면을 쓰고 정의로운 행위를 한다는 건 사사로움에서 벗어나서 정의의 화신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니까요. 예를 들어, 스파이더맨은 정체를 철저히 숨기기 때문에 숙모 메이나 아내가 보복으로 위기에 처할 것을 걱정하지 않고 악당을 벌할 수 있습니다. 반면 정체를 숨기지 않는 아이언맨은 완전히 사사로운 - 정치적인 맥락 속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지요. 아이언맨은 미국 대통령도 주기적으로 면담하고, UN 총회에도 참석하는 캐릭터니까요.
- 어찌됐건, 시빌 워의 최종 승자는 아이언맨입니다. 압도적인 찬성여론 아래 초인등록법은 실행되고, 반대하는 영웅들은 전부 감금돼요. 이는 초월적인 영웅의 시대에서 사사로운 영웅의 시대로 세상이 바뀌었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결말이기도 하죠. 다만 이후의 전개과정이 마냥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뭐 몇 년에 걸쳐서 서서히 진행되긴 했지만... 그린 고블린을 위시한 악당들이 권력을 잡고, 아이언맨은 추방당하고, 스파이더맨의 숙모 메이는 저격당하는 등등...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어두운 에피소드들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특히 캡틴 아메리카의 죽음은 많은 미국인들에게 충격을 안겼다고도 하는데... 설명하자면 길고... 중요한 것은 초인등록법에 반대했던 이들, 즉 이전 시대의 초월적인 영웅들이 소멸하며 마지막으로 경고했던 모든 일들이 다 일어났다는 점이죠. 이건 뭘 말하는 걸까요?
- 영웅들이 더 이상 '옳은 결정' 을 하지 않는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한편으로는 '옳은 결정' 이란 것 자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어떤 점에서 옳다 하더라도 어떤 점에서는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죠. <다크나이트>의 배트맨이 처하게 되는 딜레마도 그렇습니다. 조커라는 미친놈은 배트맨 때문에 존재하죠. 조커를 없애는 방법은 배트맨 자신이 활동을 그만두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영웅과 악당이 동전의 양면인 배트맨의 세계는 그를 끝없이 좌절시킵니다. 그래서 배트맨은 좌절하는, 늘 우울한 영웅이죠. 그의 결정은... 그냥 옳다고 생각하는 걸 하는 겁니다. 묵묵히. 묵묵히... 맨날 탈옥하는 조커를 잡아넣는 일을... (사람 죽이는 건 신념에 어긋난다고 죽이지도 않아요...)
- 사실 오늘날의 슈퍼히어로들은 고뇌 끝에 올바른 길을 간다기 보다는 고뇌 끝에 굳은 의지를 갖게 된다고 설명하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자면 그들은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이상해지더라도, 내 정의가 너의 정의와 다를지라도, 내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더라도, 그냥 밀고 나가다보면 언젠가는 흥하리라. 안 흥하면 어쩔꺼야... 같은 믿음이랄까.
- 슈퍼히어로 캐릭터 각각에 대한 평도 하고 싶은데, 이건 나중에 내 블로그에서 해야지...